소설 러브레터 10
그리고 며칠후 그녀에게서 소포가 왔다. 안에는 카메라와 필름까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여느때의
편지지와는 달리 조그만 카드가 첨부되어 있었다. 거기엔 조그마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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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달렸던 운동장사진을 찍어 주세요.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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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난 히로코에게 부탁받은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 이로나이 중학교로 갔다.
교문을
들어서는 것은 졸업이후 첨이었다. 옛 생각이 난다기보다 난 긴장했다. 카메라같은걸 들고 학교로 들어가다니, 어딘가 스파이같다.
분명히 난 히로코에게 일을 의뢰받은 스파이였다. 그렇다기 보다 히로코에게 교묘히 조종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인기척은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금은 봄방학이다. 아무도 없는 운동장으로 들어선 나는
소형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어떤 사진을 원하는걸까'라고 생각하면서 앵글을 찾아보았지만 평평한 운동장같은건 어디를 어떻게
찍어도 마찬가지라 금새 찍을만한 소재가 떨어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그 애가 된 기분으로, 트랙을 달리면서 셔터를
눌르기도 했다. 그래도 필름은 아직도 남아있어서, 난 남은 걸로 교정의 포플러나무를 찍고, 철봉을 찍고, 화단을 찍고,
수도꼭지를 찍고, 교사(校舍:학교건물)을 찍었다. 찍다보니 욕심도 생겨서 난 교사안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예전엔 자유로이 오고
갔던 복도를 이렇게 도둑놈같은 기분으로 걷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교무실에는 누가 있는 듯해서
'후르륵'하고 차마시는 소리가 복도까지 새어나왔다. 난 숨을 죽이고 그 앞을 신속하게 통과하여, 그대로 복도를 돌았다.
휴~하고 한숨쉬고 앞을 보니 교사가 눈앞에 서 있었다.
"무슨일로 오셨죠?"
난 대답하기가 곤란해져 어떻게할까 하고
머뭇머뭇거리고 있으니 그 교사가 총총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하며 얼굴이 낯이
익었다.
"하마구치 선생님!"
난 무심결에 말을 했지만 상대방은 당장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는 모양으로 찬찬히 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3학년 2반의...."
"아!"
"후지이입니다"
"후지이!"
"예,
맞아요. 생각나세요?"
"3학년 2반, 후지이 이츠키. 출석번호가........"
역시나도 그것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교사의 의지인지, 하마구치선생은 애써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손가락을 곱아가면서 들은적있는 주문을
중얼중얼거리며 외고 있었다.
"아이자와(相澤), 오카사키(岡崎), 카토우(加藤), 코야마(小山), 사토우(佐藤),
쇼지(しょうじ), 핫토리(服部), 후지이(藤井), 야에가시(やえがし), 요코우치(橫內), 와다(和田),
와타세(渡瀨)......."
그건 3학년때의 출석번호였다. 남학생의 번호가 끝나자 하마구치선생은 여학생의 출석번호를
손가락으로 세기 시작했다.
"이토우(伊藤), 엔도우(遠藤), 오오타(大田), 칸자키(神崎), 스즈키(鈴木),
츠치야(土屋), 테라우치(寺內), 나카지마(中島), 노구치(野口), 하시모토(橋本), 후지이(藤井),
후나바시(船橋)............."
그리고 접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서
"24번!"
들으니 생각이 났지만 분명히
24번이었다.
"우와~ 어떻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나는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오늘 무슨
일로?"
"그냥 한번 와봤어요"
"그냥 올 만한데가 아닌데"
"친구가 학교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해서요"
그건 사실이었다.
"학교사진? 뭐에 쓸려고?"
"........글쎄요, 그것까지는"
이것도
사실이었다. 선생님도 그 이상 캐물어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오늘 도서관에 볼일이 있어서 출근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너도 도서위원이었지?"
정말로 뭐든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도서위원이예요"
"뭐? 아직까지?"
"시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예, 인연이
있나봐요"
"그럼 여기 일도 전혀 쓸데없지는 않았었네?"
"도서부원은 좋았었는걸요"
"그랬구나. 좀 괴짜라고 생각은
했지만서도"
이러쿵저러쿵하는 동안에 우리들은 도서관에 닿았다.
"좀 보고 갈까?"
도서관에는 몇 명의 학생들이 전부
책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오늘은 책장정리하는 날입니까?"
"응"
"저도 했었어요.
봄방학에"
"도서위원이라면 으레 하는 행사니깐"
"모두 모여봐!"
하마구치 선생의 호령에 학생들이
모였다.
"너희들의 선배인 후지이 선배다"
난데없이 소개를 했기때문에 난 허둥지둥대면서 모두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학생들도 갑자기 모르는 사람을 소개해서 곤란했던지 수줍어하면서 소근소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래도 이상했다. 소근거리는
목소리속에 내 이름이 섞여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걸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한 학생이 갑자기 나한테
질문했다.
"후지이 이츠키선배님이죠?"
나는 놀랬다. 학생들은 킥킥대고 있었다.
"너희들 알고있니?"
나 대신에
하마구치선생이 물어보았다.
"예? 진짜예요?"
라고 말한 사람은 방금 내 이름을 맞춘 학생이었다. 갑자기, 학생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입마다 거짓말! 또는 진짜? 라고 말하면서 소란을 떨었다. 우리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잠시후 소란이 가라앉고 나서야 학생들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선배님, 이미 선배님은 우리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인걸요"
"그건 과장이 심한데"
"있다!"
학생중의 한 명이 책 한권을 들고 왔다. 그리고 뒷장을 펼치고 안의
카드를 빼내 나한테 보여주었다.
"이거 한번 보세요"
난 카드를 보고 놀랬다. 그것은 그 애가 장난으로 후지이
이츠키라고 썼던 그 하얀 도서대출카드였다. 설마 남아있으리라고는. 학생들이 내 주위를 감싸고 함께 보았다. 그리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들 사이에서 '후지이 이츠키찾기 게임'이란게 유행하고 있어요"
"맞아요"
"맨
첨엔 누가 발견했더라?"
"구보타(久保田)아냐?"
"아! 맞다. 구보타, 구보타 맞어"
"이런 카드가 몇장이나 더 있다는 걸 발견했죠. 그래도 처음엔
붐이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몇 장이나 있다는걸 알게 돼서"
"그러는 중에 몇 권이나 발굴해냈어요"
"누가 가장 카드를
많이 찾을 수 있는가에 경쟁이 붙은거예요"
"후지이 이츠키 게임이란 이름, 누가
붙였더라?"
"누구였더라?"
"그래서요, 도표까지 만들었어요"
"이거예요"
학생들은 그 도표까지
보여주었다.
"지금까진 제가 1등이예요"
"마에가와(前川)가 그 뒤를 맹추격하고 있죠"
"일단, 남자여자 편갈라서
하고 있어요"
"그럼, 아직도 많이 있는거니?"
"몰라요. 모르기때문에 재미있잖아요"
난 감동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설명하는게 어렵지만서도 강한 감동을 느끼고 있었다. 고작 도서 대출카드이지만서도 그 애가 써넣은 이름이
10년이나 이 곳에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설마 본인과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아무래도 모두들 내가 쓴 거라고 잘못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냐. 이건 내가 쓴 게 아녜요"
모두들
갑자기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 시선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에, 엉겹결에 변명을 할 처지가
되었다.
"도서위원중에 다른 애가 장난한거예요"
모두들 감탄하면서 수긍했다. 학생들에겐 수수께끼의 '후지이 이츠키 카드'의
기원이 지금 샅샅히 밝혀질려고 하는 것이다. 모두 다음 설명을 마른침을 삼키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거 뿐이예요"
모두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 한 여학생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선배님의 이름을 써 넣은거예요?"
"응?"
아무래도 모두 카드에 있는 이름을 내 이름이라고 찾각하는 것 같다. 같은
이름이니 그럴만도 했다.
"그 사람, 남자예요?"
"잉?.............그래요"
"그 사람, 선배님을
무지 좋아했나봐요"
"엉?"
"그러니깐 이렇게 많이 선배님의 이름을 써 놓았잖아요"
또 다시 학생들은 난리법석을
떨었다. 모두 꺄~~ 꺄~~ 거리면서 소란치는건 상관없지만서도 그 와중에 "사랑이야기다"같은 말이 들리는건 듣고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아녜요. 그게 아니라니깐!"
하지만 이미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다.
"후지이.........."
하마구치 선생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예?"
"얼굴이 빨개"
난 두
손으로 볼을 눌렀다. 화끈거리는걸 스스로도 느꼈다. 그걸 본 학생들은 더욱 놀렸다.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수습불능이었다. 예상치 못한 일로, 난 나의 모교에 사랑의 전설을 남기고 말았다. 아마 대대로 전승되어 갈 것이다. 그것도
괜찮을래나.난 '사랑의 카드'를 기념으로 2장 받아 도서관을 나왔다. 1장은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보내 줄려는
것이었는데, 괜히 내 것도 1장 갖고 싶어진 것이다. 카드와 사진을 동봉한 편지를 와타나베 히로코에게 보냈다.
학교에서 일어났던 일도 자세하게 써서 보냈다.
며칠후 답장이 왔다.
그건 짧고 암시적인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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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후지이 이츠키씨.
사진과 카드 잘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진짜로 그의 이름입니까?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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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난소식을 받은 히로코는 즉시 현장으로 향했다. 신칸센(新幹線:일본의 고속전철)에서 완행열차로
바꿔탔는데, 거기서부터 너무나 오래 걸렸다. 2량만 달고서 각 역마다 정차하는 디젤기관차는 조급한 히로코의 마음과는 정반대로
느긋하게 시골의 산골짜기를 히로코한테 보여주면서 달렸다. 먼 곳에서 들리는 건널목의 신호소리가 울기 시작할때부터
끝날때까지의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느껴져, 커다란 짐보따리를 들고 타는 행상아줌마들이 마치 달팽이처럼
보였다. 늦에 타는 승객들을 위해서 일부러 일시정지할 때마다, 히로코는 몇 번이나 초조한 한숨을 쉬었다. 시골시간. 그것은
갑자기 찾아 온 히로코의 기분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어보거나, 구름을 움직여보거나, 얼어붙은
강바닥의 작은 돌멩이를 굴려보거나 하는 것이었다.
겨우 당도한 역에서부터는 흡사 전쟁터같이 보였다. 지역소방단의 트럭을
타고 산기슭까지 가 보니, 임시로 지은 텐트주변은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리고, 눈앞에는 산 정상이
구름에 드리운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먼저 도착한 그의 부모가 텐트 안에 있었다. 두 사람 다 더할 나위 없이 초췌한
모습이었다. 두 사람뿐만 아니라 텐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등산대의 가족들은 모두들 수척한 얼굴로 불안한 듯이 산정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착하고 20분 후.
산등성이를 따라 이동하던 헬리콥터가 하산하여 내려왔다. 굉음과 함께 눈앞의 설원에
착륙하는 헬리콥터는 흡사 영화의 한장면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히로코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헬기 안에서 구조대가 내려오고, 들것이 차례차례 밖으로 옮겨졌다.
가족들이 차차 모여들었다.
"모두들 괜찮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이라!"
대장같아 보이는 사람이 그렇게
외쳤다.
맨 마지막은 아키바였다. 그는 구급대원에게 어깨를 기대면서 자기의 힘으로 걷고 있었다. 히로코는 아키바에게로
달려갔다.
"아키바씨!"
아키바는 히로코의 얼굴을 보자마자 갑자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마치 길잃은 어린애가
엄마와 다시 만난 순간같은 모습이었다. 다 큰 어른이 이런 식으로 울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진짜 어린애처럼 아키바는
큰 소리로 흐느껴 울었다. 그리고, 울면서 아키바는 이렇게 말했다.
"용서 해 주라, 히로코! 용서 해
줘!!"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빨려들어간 그를 아키바 일행이 구하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party(등산에서의 그룹)는 3일간 산 속을 계속 헤매서, 발견도 결코 빠르지는 않았다. 구조대의 대장은 살아있던 것이
신기할 정도라고 말하고 조난시의 아키바 일행의 리터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실로 기적적인 생환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히로코는 아키바와 함께 예전의 2량짜리 완행열차에 타고 있었다.
"이제 한 정거장 남았어"
아키바의
말을 듣고 히로코는 놀랐다. 그렇게 길게만 느껴졌던 거리가 오늘은 무척이나 간단하게 지나쳐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안간
안절부절못하게 된 히로코는 차분하게 있질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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