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것

Date : 2004-05-19, Hit : 11972 , IP : 210.119.xxx.xxx

소설 러브레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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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후지이 이츠키씨
잘 지내고 있습니까?
당신이 말한 후지이 이츠키와 제가 아는 후지이 이츠키는 아무래도
동일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의 주소를 저는 그의 졸업 앨범속에서 찾아내었습니다.
아마도 그것과 같은 앨범이 당신 집에도 있겠죠?
지금은 책장속에서 잠자고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젤 뒷장에 있는 주소록 속에서 그의 주소를 발견한 겁니다.
그 주소속에 설마 동성동명의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경솔한 착각탓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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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앨범을 확인했다. 확실히 젤 뒷장에는 주소록이 있었다. 거기엔 물론 내 이름과 주소도 있었다. 그래도 신기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다. 이 짤막한 한 줄이 우연히 코베에 사는 그 여자의 눈에 띈 우연도 신기했고 덕분에 그런 골때렸던 편지왕래가 성립된 것도 신기했다. 편지내용은 계속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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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이런 폐를 끼쳐놓고 부탁하는 것도 뻔뻔스럽지만,
혹시 그에 관한 어떠한 기억이 있으시다면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공부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운동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성격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어떠한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이렇게 무례한 부탁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실없는 편지라고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귀찮으시다면 잊어주세요.
 ...... 그래도 마음이 있으시다면 답장을 해 주세요.
저도 기대는 하지않고 기다리겠습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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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아주 기대하고 있으면서"
이건 뭔가를 써 주지 않으면 그녀의 기분도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책상에 앉은 나는 갑자기 곤란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그 애한테 전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질 않았다. 그렇다기보다 그애 때문에 나는 중학교시절 그 자체에 전혀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고 말하는 쪽이 정확할지 모른다. 망설이면서도 우선은 난 펜을 굴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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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와타나베 히로코씨
분명하게 그애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성동명의 사람이란게 몇명이나 있는게 아니라서요.
하지만 그애와의 추억은 거의 대부분이 이름에 얽힌 것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대충 감이 잡히겠지만 그것은 절대로 좋은 추억이라고
말할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거지같았다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예를 들면 입학식 날부터 이미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으로 들어간 교실에서 선생님이 출석을 불렀을 때 나와 그는 후
지이 이츠키라고 부르자 거의 동시에 대답을 했던 것입니다.
다음 순간, 반 애들의 시선과 술렁거림이 두사람에게 집중되어 부끄러웠던 것
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구요.
나도 설마 동성동명의 남자가 같은 반에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이건 1년간 쭉 놀림당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꿈과 희망에 넘친
중학교 생활이 한번에 암담해져서 차라리 전학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
작하고픈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전학이 될 리도 없고
예감만 정확히 적중해서 동성동명이란것 만으로 주위에서 부당한 차
별을 받는 어두운 중학교시절이 저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둘이서 우연히 주번이 되었을 때는 이미 아침부터 우울해졌죠.
칠판의 오른쪽구석에 써 놓은 같은 이름에 한 우산을 쓰고 있는 낙서
를 하거나, 각각의 이름밑에 ♂라던지 ♀같은걸 그리거나, 또 수업에

쓸 프린트를 안고 둘이서 복도를 걸어가거나 방과후에 교실에서 학급
일지를 쓰고 있거나 하면 갑자기 뒤에서 「후지이 이츠키」라고 부르
고 무심결에 두 사람이 동시에 돌아보는 것을 재밌어하거나 해서, 하루
종일 놀림페스티발을 하는 듯한 상태로 변하는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까지 가지는 않지만 일정한 수준은 있는거라 그런 괴로운 나날을 참
으면서 이것도 1년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2학년이 되어
도 같은 반이 아니겠어요.
새로운 반에서 저희들은 신선한 기분으로 밑바닥부터 놀림당하는 꼴.
그리고 3학년때도 어찌된 일인지 역시 똑같은 반이 되어버린 거예요.
2년은 고사하고 3년이나 같은 반이 되면 우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
겠죠? 이것도 사실은 선생님들이 재미있어해서 일부러 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뭐 확증은 없지만서도 그런 소문이 그럴듯하게
들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는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한테는 재미있겠죠?
하지만 그 때의 저희들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 애의 부모가 이혼해서 엄마쪽 성으로 개명했으면 하고 진
심으로 바랬던 적도 있었어요. 아니면 어디 성씨가 다른 집에 양자로
들어가 주었으면 좋겠다하고 생각한 적도.
돌이켜보면 전 싸가지 없는 중학생같네요.
뭐 요점만 얘기하면 항상 이랬기 때문에, 괜시리 서로 피하게 되어서
이야기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지금 회상해보아도 확실히 기억나는게 없네요.
편지가 기

대에 미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다시 읽어보아도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편지라고는 생각되질 않습
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길
..........그럼

                   후지이 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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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후지이 이츠키씨
저의 무례한 편지에 그렇게 정중한 답장을 보내주셔서 감격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그 때문에 꽤 괴로운 중학생시
절을 보내셨군요. 그건 좀 의외였습니다.
저는 좀 더 로맨틱한 추억이 숨겨져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
었지만 현실이란게 잘 돼 가지 않는 것이네요.
그런데 그는 어떻게 생각했었죠? 당신하고 같은 기분이었나요?
혹시 자기하고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한테 어딘가 운명적인 것을 느낀거나
하지 않았나요?
둘 사이에 그러한 어떤 추억은 없었나요?
만약에 생각나신다면 가르쳐 주세요.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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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와타나베 히로코씨
그런 추억같은건 없습니다.
전에 제가 보낸 편지내용이 흐지부지였던 거 사과드립니다.
실제로 우리들의 중학교생활은 그런 사랑이니 연민이니라고 말할 만
한게 존재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살벌했습니다.
저와 그의 관계는 가령 예를 들면, 아우슈비츠(2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학살장소)속의 아담과 이브라고 할까나. 반복되는 차디찬 고문에 살아
있다는 느낌도 없었죠. 물론 그건 그한테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일은
서로가 같은 반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만약에
그것이 운명적이라고 말한다면 그 운명을 한(恨)으로 생각은 해도 절
대로 감사하진 않을 겁니다.
학급위원선거 때의 사건같은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해요.
아마 2학년 2학기가 확실할거예요.
맨 처음에 학급위원을 정하는 투표가 있었어요.
그런데 개표할때 누가 쓴 한표에 이런게 섞여있었던거예요.
『후지이 이츠키 ♥ 후지이 이츠키 』
개표하던 이나바(稻葉)였던가 이나바가 그걸 일부러 큰 소릴 내어서
읽은 거예요.
"음~ 후지이 이츠키, 하트, 후지이 이츠키"
그것도 또 서기가 칠판에 일부러 하트를 그려서 썼죠.
이미 모든 이의 박수갈채의 바다. 그래도 거기까진 아직 괜찮았죠.
이 정도의 일은 이미 익숙해졌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은거예요.
학급위원선거가 끝나고 이어서 각 전문위원의 선거가 있는데,
뭐 방송위원이라던지 그런거죠. 맨 처음이 도서위원이었어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투표용지가 돌아가는 동안에 모두 이상하게 킥킥거리고 여기저기서
"하트,하트"하는 조그만 소리가 들려왔죠.
결과는 뻔하겠죠? 거의 만장일치로 저와 그였어요.
이름이 불릴때마다 환성을 지르고 개표가 끝난 순간엔 월드컵 스타디
움같은 난리였죠. 전 완전히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이미 이렇게 되었
다면 울어버릴려고 생각했죠. 그 시절에 학교안에서 우는 사람이 이
긴다고 하는 불문율이 있어서, 여하튼 울린 쪽이 나쁜 놈이란 공식이
성립했죠. 그건 초등학교때부터 이미 그랬었고, 남자애들은 울보딱지
가 붙을 염려가 있었지만 여자애들은 무조건 우는 사람이 이긴다는게
있었어요.
하지만 전 옛날부터 우는건 비겁하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자랑은 아
니지만 유치원이후로 한번도 울어 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오늘은 괜찮다. 이런때야 말로 여자애는 우는거야라고 난 맘
속으로 바랬지만 평소의 연습도 없이 갑자기 울 수가 없는거예요.
책상밑에서 주먹을 거머쥐고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눈물을 쥐어 짜 볼
려고 했지만 안 나오는거예요.
그러고 있으니 앞자리의 남자애가 나를 쳐다보고
"이런! 얘 운다!"라고 큰 소리로 놀리는 거예요.
그건............ 쿠마타니 카즈야(熊谷和也). 땅딸보 원숭이같은 놈.

그 말에 열 받았죠. 그러니깐 전 아직 울고 있지 않는데도 말이예요.
그 한마디에 더 이상 울 마음이 싹 달아났죠.
이렇게 된 김에 화풀이로 이 놈을 흠씬 패줄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먼저 그 애가 선수를 쳤어요.
쿠마타니 카즈야의 의자를 차버리고 책상위에 뒤집은거예요.
그리고 "기분 안좋아!"라는 말을 내 뱉고 교실을 나가 버렸죠.
교실안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죠.
그런데 그 때 개표하던 이나바가 장난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짝짝짝짝짝"
그게 그 애 귀에 들린거예요.
갑자기 엄청나게 씩씩대면서 되돌아와서, 다시 보니깐 난투극을 벌이
고 있었죠.
이나바도 처음엔 농담이니 어쩌니 말하며 그 애를 진정시킬려고 했지
만, 그 사이에 열받아서 난 안했어! 난 안했어!라고 도통 알수 없는
소리를 해대고 서로 때리고 패고하는 싸움이 벌어졌죠.
결국 그 놈을 때려눕히고 올라타서 이나바의 목을 조른거예요. 혹시
한순간의 살의(殺意)가 있었을지도 몰랐죠.
그 애가 전혀 손 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모두들 당황해서 제지하려고 했죠.
모두 그 애들 말려서 겨우 싸움은 끝났어요.
그런데 이나바가 어찌 되었냐면 거품물고 기절해 버렸어요.
사람이 기절하는건 전 그 때 처음으로 봤을겁니다.
그 제서야 겨우 선생님이 와서 싸움은 끝났지만 그 사건은 학급안에
싫은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해요.

그 이후로 우리들에 대한 장난은 거의 없어졌지만 그 대신에 어딘지
소외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항상 들었거든요.
결국 그 때의 투표는 무효로는 되지 않고 우리들은 함께 도서위원을
맡게 되었지만 그는 동아리활동이 바쁘다는 말로 거의 얼굴도 내밀지
않았어요.
가끔씩 도서관에 와도 일에 방해만 될 뿐 전혀 할 맘이 없는듯 했습
니다.
3학년이 되어서 반이 바뀌고 이름갖고 놀리는 풍습이 되살아 났을 때
에는 오히러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3학년이 되자 모두들 조금은 어른스러워져서 놀린다고 해도 심할정도
는 아니었지만.
에구, 길게 써버렸는데 어쨌든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기대하고 있던 일이 만약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건 서로간에 이름이 다른 경우가 확률이 높았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차피 그러지 않았을지도.
 .................. 당신은 그의 어디에 끌렸습니까?

                   후지이 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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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후지이 이츠키씨
그는 언제나 먼 곳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눈동자는 언제나 투명해서 지금까지 만난 누구보다도 깨끗했습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할까나요.
그래도 그가 좋아진 것은 그게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등산하고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던지 산을 오르던지 둘 중
의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의 산을 올라가고 있거나, 그림을 그
리고 있을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 속에서 여러가지 일을 추리해 봅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편지속에서
'도서관에 와도 방해만 된다'
라고 쓰여져 있으면, 그였다면 어떤 식으로 당신의 일을 방해할까?
라고 생각해 보기도 하는겁니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또 이상한 짓을 하거나 한걸까, 책에 이상한 낙서
라도 하거나 한건 아닐까, 같이 멋대로 상상해보는것입니다.
그러니 뭐라도 좋으니 가르쳐주세요.
시시콜콜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쪽도 여러 가지로 추리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잘 부탁드립니다.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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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와타나베 히로코씨
당신의 부탁은 제게는 도리어 어렵네요.
그러니깐 시시콜콜하다고 해도 사소한 일은 벌써 잊어버린걸요.
졸업하고 10년이 지났어요.
벌써 기억도 모든것도 어렴풋한게 사실입니다.
단지 장난이라고 생각난 일이 있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쓰겠습니다.
3학년 때였나.
저는 사실 억지로 맡겨진 도서위원이 꽤 맘에 들어서 3학년 때에는
자청해서 도서위원으로 후보등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손을 들자
그 애도 손을 든거예요. 후보는 우리 두명뿐. 물론 예상대로 모두의
차가운 공격이 있었죠. 그래도, 그것보다 열받았던게 그 애가 후보로
손들었다는 것.
그러니깐 그 앤 도서위원이 된다고 한들 절대로 일을 안하기 때문인죠.
그 애도 그걸 노린거죠. 2학년 때에 완전히 재미를 봤거든요.
아니다 다를까, 그 애는 전혀 일하지 않았어요. 동아리활동이 바쁘다
고 말하고 거의 대부분 얼굴도 내밀지 않았지만, 가끔쯤은 와서 책정
리하는 것 정도는 해도 좋잖아요. 반환한 책을 책장에 꽂는것도 도서
위원의 일이었죠. 그래서 접수하는게 바쁠때는 혼자서는 손이 모자르죠.
그래도 그애는 가끔 와서 전혀 하지 않았아요.
그런데, 와서 뭘 하냐하면 이상한 장난을 하는거였어요.
그 애가 도서관에 오면 반드시 몇권의 책을 빌려가는거예요.
그것도 어떤 책이냐고 하면,

 예를 들면........마랄메의 시집이라든지,
와이에스의 화집이라든지, 그딴거죠.
한마디로 아무도 절대로 빌리지 않을 만한 책.
어느 날 내가 이런 책을 읽니? 라고 물어보니
그 애는 읽을 리가 없잖아! 라고 말하는 것이었죠.
그럼 어째서 빌리는 걸까하고 생각해 보니
그 애는 단순히 아무도 빌려보지 않은 책의 아직 아무 기재도 되어있
지 않는 대출카드에 자기 이름을 쓰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거였어요.
본인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책이 불쌍하다고 말했지만......
그 애가 그런 장난을 한 건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도서대출카드에다가 낙서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혹시 했을지
도 모르겠죠.
아~ 낙서라니깐 생각이 났는데 그러고 보니깐 이런 일도 있었어요.
분명히 기말시험볼 때였죠.
채점한 답안지를 받고서 전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충격을 받았어요.
그건 제가 잘하는 영어였는데, 왠걸 점수가 27점.
이 27점이란 숫자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깐 내 필적이 아닌거였죠. 그래도 이름은 똑똑히 후지이 이츠키라고
써 있는 걸 보니 이건 그 애의 답안지가 틀림이 없겠죠?
그런데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답안지를 뒤집어서 낙서를
하고 있던거예요.
내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면 그건 내 답안지가 되는거죠.
'맘대로 남의 답안지에 낙서따위 하지마!'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
지만 수업중이라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어쨌

든 쉬는시간까지 기다렸습
니다.
그런데도 겨우 쉬는 시간이 됐지만 전 말을 걸 수가 없었죠.
아뭏튼 그 때는 모두에게 놀림받는 일에 공포증세를 느꼈기 때문에 남
들앞에서는 그 애에게 편안하게 말을 걸 수가 없었죠.
'내 답안지 돌려줘!'
그 한마디를 못하는 것뿐인데, 그 날은 뜻밖에 긴 긴 하루가 되어버
렸었죠.
말할 기회를 잡기 못한 채 승부는 방과후로 하기로 하고 결국 학교 건
물 뒤의 자전거보관소에서 그 애를 기다리는 사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 방과후의 자전거보관소는 연인들의 만남의 광장이었죠.
항상 몇몇의 여학생들이 찍어 두었던 남자선배를 기다려 여기저기서
고백하거나 편지를 건네거나 했었죠. 전 많이들 하는구나 하고 평소
엔 딴사람인양 지나쳤었지만 그 날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었죠. 처
음엔 저도 문제의 중대함을 알지 못하고 그냥 한모퉁이에서 멍하게 서
있었는데 모두들 몹시도 말똥말똥 저를 보고 있던 것예요.
뭘까하고 잠시 생각해본 전 겨우 그 이유를 깨닫고, 깨달은 순간 무의
식중에 기절할뻔 했습니다.
전 단지 답안지를 받기 위해 그곳에 있었던건데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남자를 밝히는 여학생들과 구분이 가지 않는거죠.
아냐! 난 아니란말야!
전 마음속에서 무심결에 외치고 있었죠. 하지만 주변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는 봐주지 않는거였죠.
"쟤 2반의 후지이야"
소근거리는 소리까지 들려 이제 어

떻게 할까 망설이고 있었죠.
그건 정말로 괴로웠어요.
더 이상 견딜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돌아갈려고 생각했지만, 그 때 옆
에 있던 여자애가 말을 걸어왔었죠.
보니깐 그 애는 옆반의 오이카와 사나에(及川早苗)였죠.
말해본건 그 때가 처음이었지만서도 남자애들 입에 오르락 내리락하
는 날라리타입의 여자, 중학생인 주제에 이상하게도 색을 밝히는 여
자. 있었죠? 그런 애들(당신이 그런 타입이었다면 죄송합니다)
오이카와 사나에는 저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죠.
"너도 누굴 기다리고 있어?"라고
기다린다고 말하자면 기다리고 있는 터라 전 무심코 끄덕이니깐 그녀
는 이렇게 말하는거예요.
안 오는거야? 라고
별 수 없이 또 끄덕이니 그녀는
"......서로 괴로운 처지네"
그리고 휴우~하고 한숨까지 쉬는게 아니겠어요. 난 난 아냐라고 말하
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수 없어서 그대로 잠시동안 거기에 서 있었죠.
그러고 있자니 그녀가 또 말했죠.
"남자는 나빠"
"응?"
"그렇게 생각 안 해?"
.......................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녀는 갑자기 울기 시작했죠.
혹시 그녀는 중학생이면서 어른흉내를 살짝 내봤을지도 모른다고 생
각하니 갑자기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어서 두근두근거렸던 게 기억이
나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 우선 손수건만 빌려주었죠.

하교길의 학생
들이 아까보더 심하게 쳐다보면서 갔었어요. 전 친구도 아무 것도 아
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위로하는 척 하면서 주변사람들의 시선
을 돌렸죠.
한바탕 울어제끼고 나서 그녀는 일어나서 코를 훌쩍거리면서
"그래도 여자쪽이 더 나쁜데"
........ 혹시 아직까지 전 그녀의 조숙함에는 이르지 못한것 같지만서도
그건 그렇다고 치고 그녀는 저에게 손수건을 돌려주며
"먼저갈께. 힘내"
라고 말하고 돌아가 버린거죠.
전 또 다시 혼자.
하지만 저의 고뇌따위 오요가와 하야나에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닌걸.
그렇게 생각하면서 뾰쪽한 수 없이 기다리기로 했죠.
동아리활동을 끝내고 그애가 나타났을 때는 거의 모든 애들이 하교해
버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날도 저물어 주위도 깜깜해서 말을
걸기엔 절호의 찬스였죠.
"야~ 잠깐만"
어둠속에서 부르니 그애도 상당히 놀랐었죠. 저도 상당히 무시무시한
목소리였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깐 그 애가 자기 답안지를 알아채지
못한 탓으로 이렇게 잡친 하루가 되어버렸던거죠.
사실 목이라도 조르려고 생각했을 정도니깐요.
"뭐야. 너냐? 놀래키지마"
전 용건만 말했어요.
"오늘 시험답안지, 잘못받지 않았어?"
"응?"
"이거 후지이군께 아냐?"
그렇게 말하고 답안지를 쳐들었는데도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
았죠

.
그 애는 자전거의 페달을 돌려 라이트를 켜고 그걸로 볼려고 했지만
페달을 돌리면서 보는건 좀 무리였죠. 아무래도 잘 안되어서 하는 수
없이 제가 페달을 돌려 주었죠.
"뭐하는 거야? 보면 금방 알잖아!"
그래도 그 앤 쫌만 기다려봐라며 시간을 끌었어요.
전 점점 손이 저려와서 뭐하고 있는걸까하고 생각하자 그 앤 불쑥,
"broken였네. breaked가 아니었구나" 라는거예요.
요점정리하면 그 앤 답맞추고 있었던거예요. 믿기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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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쓴 난 문득 생각이 나서 다락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중학교시절의 교과서랑 노트같은게 들어있는 상자를 열어 안을 뒤졌다. 그리고 바인더에 철해놓았던 프린터더미 중에서 문제의 답안지를 발견했다. 역시 영어답안지로서 뒤에는 그가 무심결에 그린 낙서가 남아 있었다. 그 낙서가 예상외로 깨끗한 데셍인걸 보고 난 놀랬다. 그러고 보니 히로코의 편지중에 그가 그림을 그렸다고 했었다. 혹시 그건 이 답안지는 히로코에게는 소장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보내준다면 기뻐하겠지.
그 그림은 당시 유행했던 미야자와 요시코(宮崎美子)의 청바지를 벗는 광고사진이었다.
"뭐하는거야?"
놀래서 돌아보니 할아버지가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이사준비야?"
"아니"
"그래?"
할아버지는 그래도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갈려고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왜?"
"이츠키, 너 이사하는거 찬성하니?"
"예?"
"찬성이야?"
"찬성도 반대도 아니지만 벌써 이렇게 낡아빠진 집인걸"
"찬성.인가?"
"................"
할아버지는 뭔가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면서 내려갔다. 난 좀 오싹하였다. 드디어 올게 온건가 하고 생각했다. 그 얘기를 엄마한테 하니깐 엄마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해서 날 놀래켰다.
"인간만 아니라면 이 집에 버리고 가는데 말이야"
"무슨 말이야?"
"실은 할아버

지에게는 그게 행복인거야"
이 사람과 할아버지 사이에는 가끔 헤아릴 수 없는 단절이 보였다 숨었다했다. 아빠가 없는 지금 두 사람은 생판 모르는 타인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 간섭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른들의 얘기이니깐. 중학교시절부터 그렇게 결심하고 그대로 오늘까지 이른 것이다. 난 방에 돌아가서 편지를 완성했다. 그리고 아까의 미야자와 요시코가 그려져 있는 답안지와 함께 봉투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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