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것

Date : 2004-05-19, Hit : 13319 , IP : 210.119.xxx.xxx

소설 러브레터 13

 

도시에서 살면 밤의 어둠을 진지하게 느끼는 일은 적지만, 산의 밤은 말 그대로 새카만 어둠이다. 아키바와 히로코는 그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저 멀리에 빛이 보였다.
"저기야"
아키바가 말한 카지아저씨 집이었다. 제법 멀다고 생각했는데, 걸어보니 훨씬 멀었다. 겨우 당도한 그 집은 등산가들이 이용하는 로그하우스(log house)였다.현관에 서서도 히로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채였다.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자고 가자. 괜찮지?"
아키바가 상냥하게 말했다. 그리고 나무로 만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나온 카지아저씨를 보고 히로코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의 긴장이 풀렸다.
"시게루(茂), 늦었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두 사람은 반갑다는 듯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키바는 히로코를 소개했다.
"와타나베 히로코야"
카지아저씨는 히로코에게 악수를 청했다. 히로코는 악수를 받았지만 입가가 실룩실룩거리는 걸 열심히 참고 있었다. 처음 만난 사람을 보고 웃는 등의 예의없는 실례를 범하지 않는 히로코였지만 그래도, 웃음이 터진건 카지(梶)아저씨의 머리털이 아주 훌륭하게 치솟아서 이름 그대로 카지(火事)아저씨였기 때문이다.
카지아저씨는 솔직한 사나이라, 아키바가 말한대로 히로코도 금새 허물이 없어졌다. 카지아저씨의 18번요리인 산채남비요리도 맛있었다.얘기도 잘 풀리고 그리고 어느덧 화제는 그의 얘기로 바뀌었다.
"정말 아깝지. 좋은 놈일수록 일찍 죽나 벼"
그렇게 말하고 카지아저씨는 국을 후르륵 마셨다.
"히로코, 이 사람, 전에 본적 있어?"
"응?"
하지만 기억은 없었다.
"글쎄요,,,,,"
"이렇게 우락부락한 얼굴인데"
"이 바보야. 우락부락한건 얼굴이 아니라 머리다"
카지아저씨는 자기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히로코에게 말했다.
"그 땐 등산모자 썼었는데"
'그 때'라고 들어도 역시 기억이 안 났다. 난처해하는 히로코에게 아키바가 내막을 밝혀주었다.
"카지아저씨도 그때 같이 있었어. 조난당했을 때"
"아아"
히로코는 겨우 생각해냈다.
"근데 그땐 머리가......"
"예. 털이 훨씬 많았었죠"
"핫!핫!핫!"
아키바가 큰 소리로 웃었다.
"아저씬 훌륭하지. 그 조난당한 이후, 여기서 등산객들 시중들어주고 말야"
"어머나~"
"아뇨. 조난 당한 덕택에 저 산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알게 되어서, 그래서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저긴 위험하다, 이 날씨엔 조심하는게 좋다라든지 잔소리 해대랴 그러니 거북해들하죠"
"아저씬 그렇지 않아. 나 같은 놈은 산에서 도망쳤지만서도"
"또 오르고 싶은건가? 맞나?"
"그건............ 그래도 무리야"
"왜?"
"이젠...........무서워"
"................"
자리가 묘하게 침울해졌다. 하지만 또 흥을 돋구려고는 하지않고 둘이서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각자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 히로코는 두 사람의 얼굴을 돌아가며 보았다. 지금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조난당했던 때의 일이 밀어닥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건 히로코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한 기억일거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상당히 온화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히로코는 본적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술에 취한걸까, 문득 카지아저씨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인걸 알아챘다.
"뭐예요? 모두의 테마곡이예요?"
히로코가 물어보았다.
"응?"
카지아저씨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노래, 그 놈이 마지막으로 부른 노래야. 골짜기바닥으로 떨어져서말야.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 노래만 들렸었지"
히로코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아키바를 보았다.
"왜 하필이면 인생 마지막 순간에 마츠다 세이코를 부른걸까. 갠 마츠다 세이코를 젤 싫어하는데"
아키바는 쓴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해까닥 돈 놈이야"
"맞아"
또 다시 침묵이 세 사람을 감쌌다. 세 사람 사이에는 그가 있었다. 각자의 뇌리를 그의 추억이 돌고 있었다. 히로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걸 깨달았다.
"나 그 사람한테서 프로포즈받지 못했어요. '키쿠세다이'까지 불러내선 손에다 떡~하니 반지케이스까지 쥐고 있었죠.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둘이서 2시간장도 가만히 벤치에 앉아은 채였죠. 그러던 중에 왠지 불쌍하게 느껴져서 하는 수 없이 제가 먼저 말해주었죠. 결혼해 주세요라고"
"히로코가?"
아키바가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그 사람.........."
"어떻게 했는데?"
"딱 한마디. '좋아'라고"
"푸하하하하하하하"
카지아저씨가 큰 소리로 웃었다. 히로코는 웃길려고 한 얘기가 아니었다. 카지아저씨는 그런 표정을 지은 히로코를 보고 머리를 긁었다.
"미안미안"
"하지만 걘 여자 앞에선 진짜 뜨뜻미지근한 남자였어"
아키바가 말했다. 그건 히로코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점이었다.
"맞아. 그래도, 모두 다 좋은 추억인걸"
"그래"
"좋은 추억 잔뜩 만들어 준 걸"
"그래"
"그런데도, 또 뭔가를 만들고 싶어서"
".............."
"편지까지 쓰고"
".............."
"죽은후에도 쫓아가서 맨날 떼쓸 여자야"
".............."
"버릇없는 여자야"
그리고 히로코는 익숙치 않은 술을 들었다.
다음날, 동이 트기 전에 아키바는 히로코를 깨웠다.
"히로코, 이제 곧 일출이야. 보러 안 갈래?"
히로코는 코트를 걸치고 아키바와 함께 뒤를 따라 나섰다. 히로코는 눈을 번쩍 떴다. 눈앞엔 멋진 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아키바가 말했다.
"산이야"
히로코는 엉겹결에 시선을 돌렸다.
"잘 봐 둬. 후지이가 저기에 있으니깐"
히로코는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신성한 산이 히로코의 눈에 꽉 찼다. 히로코의 눈에서 눈물이 넘쳤다. 아키바가 갑자기, 산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다.
"후지이, 너 아직도 마츠다 세이코 노래 부르냐? 거긴 춥지 않어?"
산울림이 들렸다. 아키바는 또 다시 외쳤다.
"후지이! 히로코는 내가 돌볼께---!"
산울림이 그 말을 반복했다. 거기서 아키바는 지맘대로 지금 질문의 대답을 했다.
"그래---!"
산울림이 그 말을 또 반복했다. 아키바는 히로코에게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라고 그러는데"
"........너무해"
"하하하. 히로코도 아무말이나 해 봐"
히로코는 무슨말을 외칠려고 할려다 옆에서 쳐다보는게 부끄러워져서 설원의 중턱까지 달렸다. 그리고 주저하지 않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잘·지·냈·나·요! 저·는· 잘·지·냅·니·다!  잘·지·냈·나·요! 저·는· 잘·지·냅·니·다~! "
그러는 동안에 눈물이 목을 감싸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히로코는 울었다. 정말로 어린애처럼 소리를 내서 펑펑 울었다. 카지아저씨가 눈을 비비면서 창문을 열었다.
"아이구,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왠 난리람"
"방해하지 말아야겠군. 지금이 제일 좋을 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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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와타나베 히로코씨.
우리 아버지는 감기가 도져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건 중학교 3학
년의 정월이었습니다.
정월이 되자 장례식하랴 뭐하랴, 집안이 온통 난리였죠. 장례식이
끝나자 이번엔 엄마가 과로로 드러누워 버려, 덕분에 전 신학기
가 시작됐어도, 당분간은 학교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내가 장을 보고 돌아가니, 현관앞에
누가 서 있었어요.
누굴까 하고 보니 그 애였어요.
그런데 그 애도 절 보고 놀라는게 아니겠어요.
뭐 하는거야? 라고 물어보니 그 앤, 너야말로 어째서 지금 이 시
간에 있냐고 물어봤죠.
그리고, 서로 동시에 학교는? 라고 질문하는 바람에 어색한 틈이
있었던 게 기억나요. 그래서 무슨 일인가하고 보니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돌려주라는 것. 분명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의 3권째인가 4권째인가 했을거예요. 중학교 도서관에 있다한들,
아무도 건들지 않을 책이지만서도, 그건 접어두고 어째서 그 책
을 내가 돌려줘야 하냐고 전 따졌죠. 그러니깐 그 앤 자기가 돌
려줄 수 없기에 부탁하는거라 그러는 거였어요. 왜? 라고 물어봐
도 이유를 말하지 않는 거예요.
어쨌든 부탁한다고 억지로 책을 맡기고 그 앤 돌아가 버렸어요.
그 진상을 알게 된건, 1주일 후에 겨우 학교에 간 날 아침때였어요.

교실에 들어가니 그 애 책상 위에 꽃병이 놓여져 있었어요.
하마터먼 심장이 멎을뻔 했죠. 그런데 그건 그냥 남자애들의 장
난이었어요. 반 친구들한테 물어보니 그 앤 갑자기 전학가버렸다
고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책을 돌려줄 수 없었구나 하고 혼자서
생각했었죠.
그런후에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해요?
"이런 장난 싫어!"라고 말하고 그 애 책상 위의 꽃병을 쳐서 깨
버렸어요.
갑자기 반이 물 끼얹은듯이 조용해지고, 반 애들 시선이 저에게
집중했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분명히 뭔가에 화가 나 있었어요. 뭐에 화났는지 잘 생각
나지 않지만서도, 혹시 그 때 자신도 잘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나서, 전 혼자 도서관으로 갔었죠. 그 애와의 약속을 지키
기 위해.......라고 말하면 좀 과장일까? 어쨌든, 약속한 책만큼은
분명히 도서관에 반납했죠.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그리고, 제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도 이게 끝입니다.

                   후지이 이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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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난 함께 퇴원했다.
엄마하고 아베 카스씨는 퇴원기념으로 뭐가 좋을까 물어보길래, 나하고 할아버진 정든 집으로 해달라고 졸랐다. 아베 카스씨는 맨션은 어떻게 할까하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었지만, 엄마는 찬성해 주었다.
"이렇게 된다면 아버님이 죽는게 먼전지, 집이 무너지는게 먼전지 지켜볼래"
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십중팔구 집 무너지는게 빠를 거다.
할아버지는 이제 병석에서 갓 일어났는데도 오늘도 원기왕성하게 마당의 흙을 파고 있다. 난 아직 그정도로 회복되지 않아서 툇마루에서 편지를 읽었다. 그 편지는 히로코에게서 온 마지막 편지였다. 커다란 봉투에 내가 그녀 앞으로 보낸 편지 전부가 동봉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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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후지이 이츠키씨.
이 추억은 당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응당 가지고 있어야 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당신을 좋아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당신이라서 다행입니다.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또 편지 쓰겠습니다.
..............언젠가

                   와타나베 히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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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지를 넘기니 추신이 덧붙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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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당신도 그가 좋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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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 없다니깐 그러네"
난 편지에다 대고 말했다.
"응?"
할아버지가 잘못 알아듣고 돌아보았다.
"중학교 다닐때 같은 이름가진 우리반 애가 있었거든요. 그것도 남자애"
".....그래서?"
"그거뿐예요"
"첫사랑이야?"
"그게 아녜요. 그냥, 단지 있었다는 얘기"
"흠~"
할아버지는 우두커니 마당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말할 차례예요"
"이츠키, 저것 좀 봐라"
할아버지는 마당에 나 있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리키고
"저 나무를 심었을 때, 저 놈한테 이름을 붙였었다. 이름이 뭔지 알고있니?"
"몰라요"
"이츠키(樹)란 이름이야. 너하고 같은 이름이지"
"에이~ 거짓말"
"네가 태어났을 때 저 나무를 심었단다. 그래서, 둘한테 같은 이름을 붙인거야. 너하고 저 나무한테"
"...........오잉~"
"몰랐지?"
"몰랐어요"
"아무도 모른단다. 이런건 남들 몰래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할아버지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진짜로? 지금 지어낸 얘기가 아니고?"
"글쎄, 남들 몰래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으니깐"
그 일에 관한 진상은 결국 수수께끼에 휩싸인 채 그대로다.하루카(遙香)와 아야(彩)와 케이코(惠子)는 이로나이 중학교 도서위원이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놀이로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란게 있다. 어느 날, 남자인 구보타(久保田)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어떤 대출카드를 발견했다. 도서대출카드에는 단 한사람,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이 써 있는 카드였다. 그것은 그 책을 후지이 이츠키 단 한 사람밖에 빌려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책이 몇 권이나 나왔다. 대출카드에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밖에 없는 책이. 구보타는 그걸 찾는데 열중했다. 그러는 동안에 그 일이 다른 도서위원들에게도 알려져, 어느 틈엔가 모두 경쟁적으로 찾게 되었다. 그것이 "후지이 이츠키 찾기 게임'이다.
어느날, 또 한 장의 새로운 카드를 발견했다. 발견자인 스즈키 하루카(鈴木遙香)는 이 대출 카드만큼은 원래 갖고 있어야 할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해, 친구들과 함께 그 집으
로 갔다. 그 집이란 우리집인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손님으로 난 놀랐다. 학생들은 쑥스러운 듯이 머뭇머뭇거리고 있었는데, 하루카가
"꽤 좋은걸 발견해서요"
그렇게 말하고 한권의 책을 내 눈앞으로 내밀었다. 그 책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 그가 놓고 간 그 책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에게 학생들은 뒤예요, 뒤에 대출카드요,라며 놀렸다. 시키는 대로 난 뒷장의 대출카드를 보았다. 거기엔 후지이 이츠키의 서명이 있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뒤예요, 뒤예요라고 말하고 있다. 영문을 모르는 채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 대출카드를 뒤집었다.
나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건 중학생 시절의 내 초상화였다. 문득 정신차리고 보니 여학생애들이 흥미진진하게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난 태연한 척하면서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을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앞치마엔 공교롭게도 주머니란게 어디에도 달려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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