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것

Date : 2004-05-19, Hit : 11495 , IP : 210.119.xxx.xxx

소설 러브레터 12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드러눕고 잠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갓도 할 기력이 없었고, 아무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았다. 난 베겟머리에 있던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체온을 재었다. 부엌에선 엄마가 자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느듯없이 돌아온 나를 보고
"접시 좀 날라 줄래?"
같이 한가로운 말을 하고 있었다. 난 체온계를 엄마에게 보여주었다.
"뭐야? 체온 잰거야? 몇 도야?"
엄마는 이런 말을 하면서 체온계를 보았다.
"이거 고장 난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엄마는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츠키!"
그렇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까지는 기억하고 있지만 그 뒤의 일은 아무래도 분명하지 않다. 때때로 엄마하고 할아버지의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 느낌도 든다. ................ 어딘가에서 눈이 내리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갑자기 앞에서 쓰러진 나를 엄마가 껴안았다. 그리고 거실에 있는 할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버님! 아버님!"
그 예사롭지 않는 소리에 놀란 할아버지가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다.
"구급차!"
엄마가 외쳤다.
"119에 전화해욧!"
"어떻게 된거야?"
"괜찮으니깐 전화하세요!"
"............아............"
할아버지는 거실로 돌아가 황급히 서둘러서 119번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기, 급한 환자인데요"
하지만 구급차는 지금 출발한다해도 1시간은 족히 걸릴거라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걸릴리가 없잖아!"
할아버지는 무의식중에 소리를 크게 질렀다. 그리고, 전화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잠깐 기다리고 말하며 커텐을 걷었다. 창 밖은 눈이 몹시 내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핏기가 싹 가셨다. 부엌에서는 엄마가 얼음을 부숴 얼음베게를 만들고 있었다. 그곳으로 할아버지가 갔다.
"구급찬요?"
"못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나를 안아 일으켰다.
"예? 구급차 부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대답도 안했다.
"잠깐만요, 어떻할려고요?"
"모피 갖고 와!"
"뭘 어쩌실려고요?"
할아버지는 날 짊어지고, 그 상태로 부엌을 나갔다. 엄마가 그 뒤를 쫓아와서 할아버지 앞을 가로막았다.
"설마 택시로?"
"이 근처서 택시 잡으면 15분만에 병원갈 수 있다!"
"택시는 안되욧! 잡힐리가 없잖아요!"
"안 된다면 걸어가겠다"
"무슨 정신나간 소리 하는거예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구급차 불러요!"
"1시간 걸린다고 그랬다"
"예? 어째서?"
"밖을 좀 봐!"
엄마는 밖을 보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밖을 봤을 때와 똑같이 안색이 변하며 절규했다.
"괜찮으니깐! 모피 갖고 와! 모피!"
할아버지가 고함쳤다. 하지만, 엄마는 망연자실한채로 창 밖을 내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별 수 없이 나를 데리고 현관쪽으로 향했다. 엄마는 제정신이 들자 황급히 119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 할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
"예, 얼음으로 식히고 있어요"
엄마는 전화로 응급처치 방법을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어따 전화하는 거야!"
엄마는 수화기를 손으로 막고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이츠키 내려놓으세요. 따듯하게 하는게 젤 중요하대요"
그리고 다시 통화를 계속했다.
"그리고요, 예, 예"
"어멈아!"
"제발 아버님! 이츠키를 거기 눕히라고 그랬잖아요! 따뜻하게 하는게 젤 중요하다구요!"
"응급처치는 좀 전에 들었다!"
"그러면 내려놓고 응급처치를 해요!"
"내려놔봤자 구급차는 안 오잖아!"
"온다고 말하고 있잖아요. 한시간 정도면"
"그렇게 기다릴 시간 없다!"
"기다리는게 좋아요. 119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어요"
그리고 전화로 한번 더 확인했다.
"1시간안에 온대요. 온대요"
할아버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츠키를 업고 거실을 나갔다. 그걸 본 엄마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뒤를 쫓았다. 할아버지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버님! 정신차리세요. 이츠키 내려놓으세요"
"괜찮으니깐 모피 좀 갖고 와!"
"택시는 안돼요!"
"................"
할아버지 귀에는 이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엄마는 불현듯 한없이 깊은 불안에 휩싸였다. 그리고 엉겹결에 외쳤다.
"이 애까지 죽일참이예요!?"
할아버지는 놀라며 돌아보았다. 엄마는 억지로 나를 할아버지의 등에서 떼어내었다. 할아버지는 날 뺏으려고 했지만, 엄마가 그 보다 먼저 끌어안은 채로 복도 구석으로 도망쳤다. 할아버지는 현관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는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 사람 때 어쨌죠? 아버님! 생각해 보세요!"
"................"
"119가 말하는 걸 안듣고 맘대로 택시타고 갈려다, 결국 못잡았잖아요!"
"............."
"그래서 아버님은 그 사람을 업고서 병원까지 걸어갔죠? 기억 나세요?"
"................."
"그래서 치료가 늦어서........ 그래서 죽었잖아요! 그 사람이!"
"................"
"또 같은 짓을 반복해서 어쩔려는 거예요! 이츠키까지 죽일 참이예요?"
"...........지금 밖은 눈이 많이 내린다"
"이런 땐 전문가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어요. 예? 잘 알잖아요"
"이제부터 점점 심하게 내릴거야"
"의사가 말하는 걸 듣는게 가장 안전하단 말예요, 이런 때는"
"그래서 치료가 늦어지면 어떻할거냐?"
"그러니깐..............."
"그렇게 되면 어떻할거냐니깐?"
"섣부른 판단이 가장 위험해요! 왜 모르시는거예요!"
"의사가 날씨사정까지 봐 줄까 보냐?"
"아버님! 전 보낼 수 없습니다!"
"이번엔 괜찮다"
"안되욧!"
"괜찮아"
"아버님!"
"자, 이츠키를 다오"
할아버지는 구두를 신은 채, 복도로 올라왔다.
"아버님! 안되요!"
할아버지는 상관치않고 나를 엄마한테서 빼앗으려 하였다. 엄마는 심하게 저항하면서 외쳤다.
"정신차리세요! 좀요!"
"정신차려야 할 쪽은 어멈이다!"
"아버님!"
그 때 할아버지는 문득 잡고 있던 손을 풀고, 크게 한숨을 쉬고서 일어났다.
".......그 때"
"?"
".....병원까지 걸어서 몇 분 걸렸지?"
".........꽤 걸렸요. 걸렸잖아요! 그 때도!"
"몇 분이나?"
".....예?"
"모르나?"
"1시간...... 1시간은 걸렸어요"
"그렇겐 안 걸렸다"
"1시간 이상 걸렸어요"
"40분"
"............."
"그 땐 40분이었다"
"훨씬 더 걸렸어요"
"아냐. 그렇게 안 걸렸다"
".................."
"정확하게 말해줄까? 집을 나서 병원 현관에 도착하기까지 38분이었다"
"................"
"그래도 늦었다. 어느 쪽을 택했어도 치료는 늦었다"
".................."
"지금 나간다면 구급차가 여기 오기 전에, 병원에 도착해 있을거다"
"하지만,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는데 걷는다는 건 무리예요"
"안 걸어"
"예?"
"뛴다"
"........세상에"
"난 눈 속에서 자랐다. 이 정도 눈 따위는 우습다"
"................"
엄마는 혼란으로 아무생각도 못했다.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 이츠키는 어멈 자식이다. 어멈이 결정해라"
어째서 마음이 변한건지, 엄마도 잘 알지 못했다.
".......모피 갖고 올께요"
그렇게 말하고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나를 넘겼다. 그리고, 모피를 갖고 왔다. 할아버지는 그걸로 나를 둘둘 감쌌다. 그 동안에 엄마가 코트를 갖고 왔다. 할아버지는 그걸 걸쳐입고서 나를 업은 채로 폭설이 내리는 속을 뛰어나갔다.
할아버지는 진짜로 달렸다. 엄마는 쫓아가는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뛰어가는 동안에 할아버지의 속도는 점점 떨어졌다. 이번엔 엄마가 몇 번이나 서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할아버지는 헐떡이며 어깨로 숨을 쉬고, 다리도 휘청거렸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러서야 엄마는 두 사람이 중대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님"
"어?"
"그 땐 10년전이었죠"
"그게 어쨌다고?"
"올해 75?"
"76이다"
엄마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걱정하지마.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40분이내에 병원으로 보낸다. 자, 간다"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재차 전력질주했다. 엄마는 이제 신에게라도 비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병원에 도착한때는 집을 나서서 42분후였다. 난 즉시 집중 치료실로 옮겨졌다.
간호원장이 말했다.
"아까 구급차에서 연락이 있었어요. 눈때문에 아직 집에도 도착 못했더라구요. '환자는 이미 여기 도착했습니다'라고 하니깐 놀라더군요. 제니바코에서 오셨다고요? 이런 폭설 속을 어떻게 오신거죠?"
"걸어서...........라고나 할까, 뛰어서"
"뛰어서? 따님을 업고요? 어머나!"
간호원장은 몹시 감탄했다.
"역시 어머니는 강하군요"
엄마는 솔직하게 말했다.
"아뇨. 아버님이........"
"..............설마"
그 호걸할아버지는 호흡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손녀와 함께 집중치료실 침대 위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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